• 오늘의 일기: 밤

    2022. 5. 4.

    by. 로-디

    문득 할아버지가 너무 보고싶은 밤이다.

    대학교 1학년, 정말 여느날처럼 평범한 날이었다.
    과제는 많고 몸은 피곤하고,
    도서관 2층 개인 독서실에서 팔을 베개삼아 잠깐 눈을 붙였었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번뜩 눈을 떴는데 이 세상에 마치 내가 혼자인 것처럼 고요함이 감돌았다. 따뜻하다 못해 뜨거운 햇살이 통유리창 너머로 나를 환히 비추고 있었고 낯선 공기가 나의 정신을 깨웠었다.

    아직도 그 때 그 공기 그 냄새 그 햇살이 생생하다.

    때 아닌 맑은 정신에 기분 좋은 기지개를 펴고 노트북을 열었는데 아빠한테서 카톡이 와있었다.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고.

    오래간만의 낮잠과 맑기만한 하늘도 햇살도 다 너무 원망스러웠다.

    할아버지는 정말 따뜻한 분이셨다. 아빠랑 삼촌들은 할아버지가 무뚝뚝하시다고 했지만 나에게 할아버지는 언제나 아늑한 품이었다.

    교장 선생님이셨던 할아버지는 정말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으시던 분이셨다. 모든 이에게 모범이 되신 분이셨고 아주 점잖은 분이셨다.

    그렇게 멋진 할아버지는 첫 손녀인 나를 많이도 사랑하셨다. 산책을 나갈 때면 내 손을 꼭 잡고 동네를 걸으셨는데, 동네분들이 할아버지를 보고 반갑게 안부를 물으시면 밝은 목소리로 내 자랑을 꼭 하곤 하셨다.

    가족에 동생들이 넷이나 더 생길동안에도 할아버지의 첫번째는 언제나 나였다. 내가 어릴 적 할아버지는 항상 나를 위해 무릎을 내어주시고 간식을 손수 챙겨 주시곤 했는데 내가 훌쩍 큰 뒤에도 할아버지는 항상 옆자리를 나를 위해 비워두셨다. 할아버지는 가족들 몰래 귀하다는 산해진미를 챙겨주시며 낮은 목소리로 우리 둘만의 비밀을 만드시는 것도 무척 즐거워하셨다.

    명절 때마다 5시간이나 차에 꼼짝없이 갇혀 달려야하는 그 길이 언제나 행복하고 즐거웠던 것도 그 끝에는 나를 듬뿍 사랑해주시는 할아버지가 계셔서였을 것이다.

    할아버지가 매번 그 옆자리를 톡톡치시며 나를 찾지만 않으셨어도, 전보다 내게 더 많이 기운 그 건조하고 큰 손으로 나를 꼭 잡지만 않으셨어도, 다들 잠든 새벽에 내 방을 빼꼼 확인하며 이놈아 활짝 웃으시지만 않으셨어도 이렇게 문득 할아버지가 너무 보고싶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유학을 하며 할아버지를 일년에 두 번 남짓 뵀던 것 같다. 할아버지가 병원에 계시고 부터는. 숙모들은 할아버지 상태가 안 좋으시다고 이야기했지만 내가 할아버지를 뵐때면 할아버지는 항상 그대로셨다. 조금 야윈 모습이셨지만 언제나처럼 따뜻한 미소로 나를 반기셨고 내 손을 잡고 내 하루를 물으셨고 재잘거리는 내 모습을 보며 허허 웃으셨다.

    백 번 가르쳐줘도 제자리 걸음인 내게 어김없이 바둑을 또 다시 처음부터 천천히 가르쳐주셨고 나란히 앉아 배구경기를 보며 내 손을 따뜻하게 잡아주셨다. 요즘 유행이라며 든 카메라 어플을 마주 보며 함께 사진을 찍기도 하셨고 "할아버지 검은 머리가 다시 나는걸 보니 젊어지시려나봐요!" 하는 말에 머리를 쓰다듬으시며 멋쩍어 하기도 하셨다. 가족들이 잠시 나간 틈에 어릴적 종에게 업혀 밭을 건너야 하셨던 이야기도 처음 학교에서 할머니를 만나시게 된 이야기도 첫 눈에 사랑에 빠지신 이야기도 세계 여행을 다니신 이야기도 몰래 해주셨었다. 아빠도 듣지 못한 이야기라며.

    이게 내가 기억하는 마지막 할아버지 모습이다.

    나는 할아버지가 항상 자랑스러웠다. 한 번도 그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할아버지가 떠나신 날 9시간 떨어진 한국에서조차도 할아버지를 찾을 수 없다는게 도통 실감이 나지 않았었다. 그래서 메세지를 보고 나서 무너지던 세상도 금새 제자리를 찾았었다. 
     
    또 그래서 할아버지 생각을 이렇게 마음껏 해보는게 처음인 것 같다. 아빠도 삼촌들도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지만 그 빈자리가 사무치게 쓸쓸하고 때때론 많이 아프겠지. 그런 생각에 나도몰래 나도 할아버지를 조금만 되새겼었다.
     
    오늘은 왠지 할아버지가 아낌없이 주셨던 아늑한 사랑이, 넓기만 했던 품이, 손의 그 온기와 웃는 눈이 참 그리워지는 밤이다. 할아버지는 할아버지가 나를 사랑하신만큼 내가 할아버지를 사랑한다는걸 또 기억하고 있다는걸 분명 아실거다. 내가 말하지 않아도 항상 내 모든걸 있는 그대로 그렇게 따뜻하게 이해하고 안아주셨으니까. 어쩌면 내가 많이 힘들지 않게 할아버지는 지금도 내 세상을 나눠 지고 계시는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할아버지는 지금껏 그래왔듯 내 기억속에 마음속에 오늘처럼 문득 나타나기도 하시며 항상 그 자리를 지키고 함께하고 계시는 거다.
     
    백 몇년이 지나 내가 할아버지처럼 멋진 흰 머리를 가진 호호할머니가 되어 할아버지 품을 향해 달려가면 그 때 할아버지는 언제나 그랬듯 나를 웃는 얼굴로 품에 앉히실거다. 그 때는 맛있는 간식들도 더 많이 챙겨주시겠지! 그럼 나는 오늘의 이야기들을 꾹꾹 눌러담아 할아버지께 열심히 전할거다. 할아버지보다 더 많은 나라들을 신나게 돌아다니다 왔다고 자랑도 해야지. 그럼 할아버지는 지금껏 내가 본 것보다 더 환한 미소로 허허 웃으시며 이놈자식~하시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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