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센치한 일기장

책장: 연여름 <리시안셔스>

로-디 2022. 4. 14. 05:59

<리시안셔스>

"그때의 인간성은 뭐랄까, 내가 갖춘 조건이 아니라 타인에 대한 태도였을 거야." 규희는 숲 향이 나는 차를 연달아 두 모금 마시며 오래전의 인간성에 대해 제 나름의 정의를 내렸다.

23페이지 <리시안셔스>


<시금치 소테>

정인은 벌써 며칠 이 집에 들락거린 사람처럼 말을 붙여왔다. 특유의 오지랖일까. 아니면 불행한 감정을 지워 낸 이후의 가벼움일까. 미하는 그것부터 궁금해졌다. 

122페이지 <시금치 소테>

 

그 무게가 모두 빠져나가 버린 최미하가 누구일지 도무지 상상할 수가 없었다. 알게 돼버린 것은 알아서 두렵지만, 모르는 것 역시 몰라서 두려운 것이다. 두려움이 빠져나갈 때에도 용기는 필요하다.

144페이지 <시금치 소테>

 

옵션은 상처난 부분을 지울 뿐, 새로운 행복을 가져와 주는 도구는 아니다. 그건 미하도 이미 알고 있었다.

162페이지 <시금치 소테>


<표백>

의료진은 환자의 고통을, 휴인은 빨래의 오염을, 관리자는 휴인에게 불필요한 데이터를 제거한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세탁조처럼, 병원은 얼룩을 지우는 반복 속에 있다.

199페이지 <표백>

 

"아무도 의지 않고 싶진 않은데 쓸쓸한거 아닐까요, 그 사람. 그러니까, 이야기를 해서 마음의 짐을 덜어 내곤 싶은데 같은 사람에게 하긴 내키지 않고. 일종의 자존심, 아니면 양가감정? 마음의 얼룩을 세탁한다는 비유가 맞으려나. 오염된 빨래를 세탁기에 돌린다고 세탁기도 오염 되는건 아니잖아요. 인간끼리는 아무래도 감정이 전이되니까. 말해 놓고 후회하는 경우도 있고 들어 놓고 후회할 때도 있거든요." 오히려 쉬운 설명이다. 빨래를 빠는 세탁기. 불편한 이야기를 듣는 휴인. 

215페이지 <표백>

 

선택과 책임은 당사자의 몫이다. "사실 그 친구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다기보다, 내가 그럴듯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란 걸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르죠." 내가 더 세상을 잘 안다는 뉘앙스들이 어쩔 수 없이 드러나고 만 것이다.

237페이지 <표백>

 

소식을 들은 의진에게 암전이 덮쳐왔다. 누군가 연극 무대의 조명을 갑자기 꺼 버린 것 같았다. 그 어둠은 너무나 깊고 무거워 도무지 밀어낼 수 없었다. 

254페이지 <표백>


<제 오류는 아주 심각한 것 같아요>

"저 일전에 모방 심리라는 걸 배웠는데요." 미래이가 뜬금없이 말했다. "인간들은 상대방의 비위를 맞추거나 호감을 표시하기 위해서, 아니면 소속감을 갖고 싶어서 정말로 원하는 것도 아닌데 무의식 중에 상대방과 같은 걸 선택한다고요. 맞나요?"

286페이지 <제 오류는 아주 심각한 것 같아요>

 

"인간들은 바깥 풍경이 아름답고 신기하다고 감탄했어요. 아득해지고 압도당한다고요. 하지만 제게 그런 것들은 안 보여요. 뭘까요. 아름다움을 안다는 기분은요." 

"그럼 미레이 씨는 뭘 보나요?" 테이는 물었다. 이러한 대화가 미레이에게는 불필요함의 극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하지만 주어진 생의 마지막 단락에 온갖 불필요한 것들을 경험하려는 발버둥은, 어쩌면 남은 생을 선고받은 인간들과 그리 다르지 않은 것도 같았다. 

"없음, 그리고 있음. 그리고 없음. 있음."

292페이지 <제 오류는 아주 심각한 것 같아요>


<좀비 보호 구역>

인류는 관대하고 대단했다. 인권은 최근 그 개념이 확장되거나 무너지거나, 하여간 뭐가 뭔지 모를 과도기에 있었다. 

447페이지 <좀비 보호 구역>